게시판의 용량이 작아서 글이 다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위공문대 내용을 뺐으니 첨부 파일로 읽어주십시오.
미시(未時,오후1시~3시)쯤 량주형 일행은 옥룡자(玉龍子) 도선대사(道詵大師)를 만나기 위하여 탐라 남원(南元) 법화사(法華寺)에 도착했다.
법화사는 남원 서귀포항구에서 오 리(약 2km) 정도 떨어진 오름 아래에 있었는데 언뜻 보아도 천혜의 요새지였다. 탐라명당(耽羅明堂)이 있는 행정의 중심지 산북(山北)에서 탐라 반대편까지 해안선을 따라 달려왔는데, 중간에 두 번 역참에서 말을 갈아타 빠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십대 중반인 량주형이나 사십대 중반인 양(楊)사부도 모두 말타기에는 아주 능하여 뒤쳐짐이 없었다.
“문사(文士)께서 말도 잘 타십니다.”
량주형이 양(楊)사부에게 치사(致詞)를 했다. 의외였던 것이다.
“저도 원래는 량(梁)씨이고 우리 량씨는 대체로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지요. 고쿠리(高句麗)가 망할 때 량만춘(梁萬春)성주(城主)께서 고쿠리 전역의 량씨들을 탐라로 데려오지는 못했습니다. 백성들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당나라 고종 때 일이지만 선대의 당태종 이세민이 당군과 신라군에게 고쿠리의 량씨들은 모두 참살하라는 칙명을 내려놓아서 남겨진 량씨들은 모두 성을 바꾸어 연명했던 때문입니다. 여기 있는 궁사범도 원래는 량(梁)씨입니다.”
“어허. 그래요. 몰랐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제가 감히 성주님께 가르침이라니요... 가끔 사석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는 나눌 수도 있겠습니다.”
법화사(法華寺)는 탐라에서 가장 큰 절이다. 승려의 숫자는 300명 정도인데 특이한 점은 승려 모두 일반인과 같이 머리를 기르고 있었고, 모두 무술에 능한 승병들이었다.
법화(法華)라는 절 이름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에서 나온 이름이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언행과 깨달음에 대해서 풍부한 사례를 수록하고 있는 경전(經典)이다. 충실한 내용으로 수행의 지침서로 최고라는 평을 듣는 경전(經典)이다.
하지만 법화사(法華寺)는 장보고(張保皐)가 당나라, 신라, 왜국 등의 장보고(張保皐) 상단(商團)의 근거지마다 설립한 절의 이름이기도 한데, 탐라 남원(南元) 법화사(法華寺)는 장보고가 탐라에 비밀리에 설립한 절이다. 장보고 상단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을 당시에도 장보고상단의 다른 근거지에서는 탐라 남원 법화사는 알지 못했다.
절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량주형 일행의 말들을 쉬게 하려고 마굿간으로 데리고 갔다.
“성주님께서 힘든 걸음을 하셨습니다. 아미타불.”
절의 운영을 맡고 있는 스님이 영접을 나왔다.
“주지스님께서는 탑광실(부처님의 은덕이 있는 방,보통 주지스님 집무실이다.)에 계십니다. 같이 가시지요.”
절의 중심부에 있는 탑광실에서 일행은 법화사의 주지스님인 도선대사를 만났다.
스님을 만났을 때의 예절인 삼배(三拜)를 올리려고 했으나 도선대사는 맞절로 삼배를 대신했다.
“빈도(貧道)가 탐라를 드나든지도 어언 사십년이 넘었습니다. 한때는 부친의 사연을 듣고 분노하고 복수의 광기에 몸을 맡긴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몸과 마음이 평온하니 조금은 깨달음을 얻은 듯 합니다.”
도선대사가 겸손하게 말머리를 떼며 손수 차를 대접했다.
“탐라에 용호아지발도가 탄생했다는 경사는 어제 들었습니다. 두 분 사부(師父)님들의 지극한 노력이 거둔 작은 결실이겠지요. 치하드립니다.”
“제가 십오 년 전에 아드님 이름을 지어 드렸지만 벌써 이렇게 헌헌장부가 되셨으니 세월이 참 무상합니다.”
도선대사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금오를 보며 량주형에게 치사를 했다.
“그때 금오(金烏)라고 이름을 지어주셔서 이런 광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는 아드님의 양물이 크고 불알이 세 개라서 세발달린 태양의 새 삼족오(三足烏)가 생각나서 지어 드린 이름인데 이 혼탁한 세상의 불쌍한 중생들을 구제해줄 영웅이 나타나신 것 같습니다. 경하드립니다.”
량주형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이제 황해용왕께 금오를 보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 그런 것 같습니다.”
“성주님도 알고계시겠지만 석 달 후에 계절풍에 맞추어 법화사 상단의 배가 탐라 상단과 같이 탐라 상단의 이름으로 송악(松岳)으로 출발합니다. 그때까지 석 달 간 금오는 두 분 사부님과 같이 빈도가 준비해둔 공부가 있으니 법화사에 머물며 공부를 하고 송악의 황해용왕께 가면 될 듯 합니다. 그리 하시겠습니까?”
“대사님의 은덕에 뭐라고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할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인연이라고 생각해 두시지요. 빈도도 나이가 칠십이 다 되어서 이것이 운수납자(雲水衲子,참선 수행하는 선승을 말한다.)의 마무리가 될 듯합니다.”
“그러면 저는 전에 대사께서 말씀해 주신대로 이제 금오와 부자의 연을 끊고, 탐라에서 금오를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아미타불. 견성오도(見成悟道) 그 어렵지만 가장 쉬운 길로 같이 가보시지요. 성불(成佛)하소서.”
양주형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일행이 타고 왔던 말 세 마리를 몰고 말을 달려 법화사를 떠났다.
금오의 간 곳을 모르게 하려고 호위군사도 없이 온 걸음이었다.
양주형은 바람과 같이 산북을 향해서 달려갔다.
도선대사와 미리 정해둔 일이었지만, 말위에서 양주형은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숙소를 배정받은 금오일행은 안내스님을 따라 법화사 절 구경을 하였다.
법화사 옆 골짜기로는 우마차길이 잘 닦여 있고, 튼튼하게 지은 창고건물이 요소요소에 잘 숨겨져 있었다.
“옥룡(玉龍) 장보고(張保皐)장군께서 신라에서 일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이 곳 법화사에 상단의 온갖 교역품들과 보물들을 가져다 놓으셨는데 그것들을 기본 재산으로 해서 탐라 상단(商團)의 이름으로 당, 신라, 왜국, 천축, 회회국 등과 교역을 하고 있습니다.”
“옥룡자(玉龍子)께서는 옥룡의 아드님으로 이 모든 것들의 주인이시기도 합니다.”
“따라서 저희 법화사의 승려들은 부처님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장보고상단의 상인이며 군사이고 뱃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삭발도 하지 않고 고기를 즐겨 먹으며 무술 수련과 군사조련에 힘쓰고 있습니다. 도선대사께서는 이 모든 것이 불 법리(佛 法理)에 어긋나지 않고 합당한 일이라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도선대사는 장보고의 아들로 영암 낭주 최씨 집안의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그러나 태어난지 십년도 되기 전에 장보고가 변을 당하고 장보고 일족이 신라조정의 손에 의하여 멸문지화의 변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낭주 최씨 집안에서는 처녀가 개울물에 떠내려 오는 큰 오이를 먹었더니 임신이 되었다고 소문을 내고, 깊은 산중 절에서 아이를 길러 화를 모면하게 하였다.
비록 산중 절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자랐지만 아이는 기골이 장대하고 비범했다. 때마침 신라 지방호족들에게 지금까지의 교종과는 다른 선종이라는 새로운 불교가 당나라 유학승들에 의하여 알려졌고, 지방호족들의 비호 아래 선종은 크게 성장했다.
선종은 신라의 지방조직인 9주5소경마다 각기 세력을 형성하여 9산선문(九山禪門)을 이루었다.
지리산 남원(南原) 실상산문, 하슬라(강릉) 사굴산의 사굴산문, 영월 사자산의 사자산문, 문경 희양산의 희양산문, 보령 성주산의 성주산문, 곡성 동리산의 동리산문, 창원 봉림산의 봉림산문, 장흥 가지산의 가지산문, 해주 수양산의 수미산문 등 9산선문(九山禪門)이 신라 각 지방에 근래 삼십여 년 사이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도선은 동리산문의 개산조(開山祖) 혜철대사의 계보를 잇는 장문인이었으나, 신라 최초의 선문인 지리산 남원(南原) 실상산문의 실질적인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십여년 전에는 신라 헌강왕의 간청으로 신라 수도 금성(金城)에서 왕사로 잠시 있었으나, 신라왕실의 호화로운 사치 중독과 귀족들의 아수라 권력다툼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행운유수(行雲流水) 수행승으로 전국을 떠돌며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참상을 마주했다.
“이것은 량만춘 성주의 팔우노(八牛弩)입니다.”
안내하던 스님이 전각 안쪽에 잘 보관되어 있는 거대한 팔우노(八牛弩)를 소개했다. 소 여덟 마리가 활줄을 당겨 끌어서 화살을 쏘는 거대한 석궁(石弓)이다.
이어서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노(弩)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을 애꾸눈으로 만든 영물(靈物)이 이 가운데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안내하던 승려가 웃음 띈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고쿠리(高句麗) 말기 량만춘 성주의 활약에 대해서는 금오는 양사부에게 여러 번 자세히 들은 바가 있었지만 각종 노(弩)들을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양사부와 궁사범 모두 찬찬히 노(弩)들을 보면서 그 원리를 연구했다. 특히 양사부는 각 노들의 상세한 그림을 하나하나 그렸다.
금오와 일행들에게 방 세 개와 대청마루가 있는 요사(療舍)채가 배정되었다. 다른 집들과는 뚝 떨어진 위치에 오름 중간쯤에 위치한 호젓한 곳이었다.
“황해용왕께 법화사의 비둘기를 이용하여 전서구(傳書鳩)를 날렸습니다.”
궁(弓)사범이 금오에게 보고했다.
탐라 법화사에는 바다를 호령했던 장보고 시절 구성된 각종 연락수단이 잘 유지되어 있었다. 전서구(傳書鳩)는 가장 빠른 연락수단이기는 했으나, 비둘기의 훈련 및 유지가 아주 어려워 좀처럼 보기드믄 연락수단이었다.
“석 달 동안의 공부계획을 봉서(封書)로 도선대사께서 보내왔습니다. 오전에는 자유롭게 공부하고 오후에는 도선비기(道詵祕記)를 공부하게 됩니다. 법화사에서는 점심을 먹는군요. 승려들의 무술수련이 그만큼 고되다는 뜻이겠지요. 말로만 듣던 도선비기를 저희 세 사람 모두에게 전해주시겠다고 합니다. 주 된 공부 대상은 물론 주군(主君)이시고, 저희 두 사람은 공부한 것을 무덤 속까지 함구할 것입니다.”
양사부가 차근차근 설명을 하고 화롯불에 봉서를 태웠다.
이튿날 오후. 탐라 법화사의 가장 안쪽에 있는 커다란 창고 안을 들어서자 모래와 흙, 나뭇조각 등으로 신라 전역과 탐라가 세밀한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가로 세로 모두 일곱장(丈,약21m)에 달하는 커다란 모형이었다.
창고의 한 쪽은 높이 2장(丈,약6m)의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어서 모형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신라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군요. 대단합니다.”
양사부가 모형을 보며 가벼운 탄성을 올렸다.
“도선대사께서 이 모든 곳을 다니시고 지리(地理)를 연구하셨다니 대단합니다.”
“제 고향 토산(兔山)이 저 쪽에 있군요. 동대천(東大川) 유역의 용암산지(熔岩山地)로 천험의 요새지요.”
궁사범이 감개무량(感慨無量)해서 모형 속의 고향을 쳐다봤다. 고향을 떠나 온지도 어느새 10여년이 훌쩍 지난 것이다.
“이곳은 하루 종일 쳐다보고 있어도 시간이 아쉬울 것 같습니다. 온갖 전투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금오가 모형판의 구석구석을 보며 그 정교함에 감탄했다.
“신라와 탐라의 지형도를 보니 땅의 생김새가 완전히 다른 것이 느껴지지요?”
도선대사가 누마루에 일행을 앉히고 지형도를 보며 가르침을 시작했다.
“따라서 넓고 평평한 탐라의 지형에서 즐겨 사용하는 기병대만의 돌격이나 망구다이 같은 전술들은 신라의 산지에서 사용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땅의 생김새와 기운의 흐름 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지요.”
“우리가 흔히 보는 병법서들, 주나라 손무(孫武)가 쓴 『손자(孫子)』, 전국시대 위나라 오기(吳起)의 『오자(吳子)』, 제나라 사마양저(司馬穰苴)의 『사마법(司馬法)』, 주나라 위료(慰繚)의 『위료자(尉繚子)』, 당나라 이정(李靖)의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한나라 황석공(黃石公)의 『삼략(三略)』, 주나라 여망(呂望)의 『육도(六韜)』등은 모두 중원(中原,중국)을 배경으로 저술된 것으로 산이 많고 국토가 좁은 신라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빈도는 삼십여 년전 이인(異人)을 만나 섬진강변 모래 위에서 지형과 전략의 오묘한 이치를 전수 받았습니다. 그 후에 이십여 년간은 부친이신 장보고장군의 원한을 갚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신라 전역을 다니며 지형과 그 전술적 쓰임새를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상함을 깨닫고 이후 10년간은 비보풍수로, 결함이 있는 땅들을 완전한 땅, 사람이 살기 좋은 땅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연구했습니다.”
“금번 석 달간의 공부는 지리와 전략전술에 관한 공부가 두 달, 그리고 마지막 한 달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는 천리(天理)의 진리가 모든 지리에 적용됨을 느끼는 깨달음의 공부가 되겠습니다.”
“탐라의 용호아지발도께서는 병법서들 중에 어느 것이 마음에 와 닿으셨는지요?”
“저는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가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한 번 외워보실 수 있습니까?”
“예.”
금오는 반시진(약 1시간)에 걸쳐서 차분하게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를 암송했다.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과연 놀랍습니다. 양사부께서 그동안 노고가 크셨습니다.”
도선대사가 감탄하며 양사부에게 치사를 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친다는 옛 말이 있는데 과연 그러합니다. 주군의 자질이 워낙 뛰어나셔서 저는 그저 옆에서 조력했을 뿐입니다. 다만 자만하여 나중에 큰 일을 그르치는 불상사가 있을까하여 자중을 늘 당부하여 드릴 뿐입니다.”
양사부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십대에 당나라의 빈공과에 장원급제한 수재인 양사부가 자신이 사십이 되도록 갈고 닦은 학문을 금오에게 남김없이 가르치려고 하였는데 금오는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모두 소화해 냈던 것이다.
“학생의 자질은 파악했으니 이제부터 두 달동안 강행군으로 수업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 사부님들도 옆에서 적극 도와주시기 바랍니다.”